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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종말과 죽음 3부] 10:xviii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4)

말카도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3.15 11: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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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xviii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4)



화이트 스카 군단의 소죽은 죽었어야 했다. 문이 닫힌 이래, 그는 계속 싸웠다. 때로는 홀로, 때로는 함께 설 수 있는 소수와 함께. 소죽은 팔라틴의 폐허를 돌아다니며 적을 사냥했고, 사냥할 적은 넘쳤다. 그리고 모든 걸음에서, 소죽은 제 목숨을 가장 비싼 값을 받고 넘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저 벽 너머에 남은 모두가 제 목숨을 파는 이들이었으니.


하지만 악마들은 그를 죽이지 못했다. 그리고 놈들은 사라진 것 같다. 반역자들도 그를 죽이지 못했다. 그리고 놈들은 급히 후퇴한 것 같다. 누구도 제대로 된 값을 치르지 않았다.


블러드 엔젤 군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죽은 생귀니우스의 아들들의 변화에 큰 충격을 받았다. 바알의 천사들은 벗과 적을 가리지 않았기에, 반역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전쟁 자체에 대한 증오로 느껴졌다. 통제할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힌 블러드 엔젤 군단병들이 전쟁과 생명 전체를 파괴하고자 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소죽은 그 느낌을 이해한다. 인간의 삶에 파멸 외에 무엇도 남지 않은 순간, 인간은 파멸에 삼켜져 파멸 자체가 된다. 어찌 보면, 블러드 엔젤 군단은 그보다 더 솔직하게 굴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어떤 차별도 없이, 형제와 반역자를 가리지도 않았으니까. 그저, 눈 앞의 모든 것을 죽였을 뿐이다. 그 종말적인 광란 속에는 순수한 무언가가 있었다.


더불어, 유용하기도 했다. 힌드레스 요새와 맨시플 차단문(Manciple Gard)에서, 블러드 엔젤 군단의 통제되지 않은 광란은 다른 방법으로 막을 수 없었을 대규모 반역자 부대를 무너뜨리고 몰아냈다. 소죽이 직접 그 현장을 보지 않았던가. 광기 어린 분노 속에서 펼쳐진 전쟁이었다. 천사들이, 악마와 싸우기 위해 악마로 화한 현장이었다. 어쩌면, 이것조차 황제의 마지막 소망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그 아들들이, 자신만의 지옥 속에서 적과 마주하는 것.


하지만 소죽은 그 현장을 외면했다. 블러드 엔젤 군단과 싸우고 싶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찢기는 것도 바라지 않았으니까.


사위가 아까보다 조용하다. 무언가가 변했다. 소죽은 시도나이(Cydonae) 사격선의 부서진 축내를 내려와 상투스 장벽(Sanctus Wall)의 무너진 배수로를 향한다. 하늘이 노랗게 물들었고, 저 북쪽에 마치 일출처럼 느껴지는 빛이 보인다. 적은 확실히 후퇴하고 있다. 무엇에 무너진 것일까? 놈들은 전장을 완전히 장악했었는데. 블러드 엔젤 군단의 소행은 아니었다. 블러드 엔젤 군단의 광기가 놈들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일괄적으로 물러서게 만들 지경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난 20분 동안 그가 본 블러드 엔젤 군단병들은 그 광기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소죽은 몇몇과 마주친 바 있었다. 헤매고, 멍해진 채 있고, 혹은 폐허 속에서 울고 있었다. 소죽은 어쩌면 저들의 격분이 갑작스레 사라진 것과 적의 멈춘 진격이 같은 무언가에서 기인한 증상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가 확실히 변했다.


무릎을 꿇은 소죽은 옆의 락크리트 옆에 칼을 내려놓는다. 여기에 이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살아 있었다. 죽음 앞에 체면하고 죽음을 준비했지만, 죽음은 오지 않았다. 심지어, 제대로 된 값이 치러지지도 않았다.


소죽은 자신이 흐느끼고 있음을 깨닫는다. 안도감이 아니다. 충격이다. 죽음이 그렇게 확실하게 여겨진 순간들이었는데, 이제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더 이상 세상을 이해할 수도 없다. 거의 승리처럼 느껴지는 순간인데도, 동시에 패배처럼 느껴지기도 하기에, 그는 그 느낌을 신뢰하지 못한다. 어쩌면,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한 확신조차도 잃어버리지 않았던가.


다음 순간, 소죽은 자신이 잘못 들을 수 없는 소음을 듣는다. 제때 고개를 든 소죽은, 머리 위에서 세 대의 제트바이크가 동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모습을 본다. 그의 군단에 속한 바이크들이다. 선회하는 측면에 쪼인 어스름한 햇살이 번득인다. 8킬로미터 너머, 도망치는 반역자들을 추격하고 있다. 소죽은 아직 가용한 바이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소죽은 그 추격에 즉시 합류하고 싶어진다. 매사냥에 대한 충동이 치민다. 저 멀리까지 추격하고 싶다. 케시그의 전사들에게 아직 목적이 있다면, 세상에 의미가 남아 있지 않겠는가. 다만, 아직 그 의미가 소죽에게 공유되지 못했을 뿐.


소죽은 일어서 동쪽으로 사라지는 빛나는 얼룩들을 지켜본다. 카간의 영혼이 느껴진다. 칸 중의 대칸께서 살아 있건, 아니면 죽었건, 그분은 아직 말 위에 올라 질주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들들은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달릴 것이다.


소죽은, 남은 것이 죽음뿐이라 생각했던 곳에서, 자신에게 아직 희망이 남아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희망에 죽음보다 더 큰 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종말은 꿈의 종말이며, 이 죽음은 확실성의 죽음이다. 인류가 경험적 사실이라 여긴 모든 것이 인류의 정신에서 배제되었고, 그 빈 자리에 교활한 가능성의 악몽이 조잡하게 끼워진다. 이제 심장은 다르게 뛰고, 정신은 불안정한 각으로 기울어진다. 가능성의 한계는 이제 이성의 벽을 넘었고, 누구도 감히 뛰어들지 못한 어두운 상상의 숲까지 넓어진다. 모든 것이 가능해졌고, 그렇기에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 이상 합리성에서 위안을 얻는 이는 없다. 인류는 이제 의심, 그리고 미지의 어둠에 뒤덮인 텅 빈 산의 기슭에 서 있을 뿐이다. 과학과 공리의 촛불은 밤바람 속에 버티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 촛불이 비추던 어둠만큼이나 맹목적이고 정의할 수 없는 것, 신앙이 남았을 뿐이다. 그 신앙이, 인류의 유일한 길잡이다.


인류는 이제 최악의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부터, 그 상상의 순간마다, 최악의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인류가 지금까지 매달린 채 모든 것을 쏟아부은 가장 위대한 꿈, 가장 소중히 간직했던 꿈, 제국을 곧게 세우던 중추는 부러진다. 사실과 진실을 우아하게 교차한 꿈의 모자이크는 이제 불타는 기함의 갑판 위에서 피를 흘린 채 쓰러졌으며, 무엇도 그 상처를 막을 수 없다. 장인의 안목 속에서 완벽한 규모와 정교한 상세를 담아 설계된 미래, 그 위대하고 질서정연한 계획은 무로 돌아갔다.


미래에 대한 황제의 비전은 실패했다.






시야, 실종. 청각, 극도 왜곡. 센서, 고장.


그녀가 거하는, 그녀의 모든 세상이나 마찬가지인 누스피어 공간이 더 이상 우주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


<의문>


아옛-원-태그, 엡타 전장(Epta War-Stead) 통합군의 연결체이자 대변인은 데이터의 수수께끼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데이터는 흐르지 못 하리라. 데이터는 따르지 못 하리라.


<의문/우선순위>


첫 번째로 그녀가 검토한 것은, 거짓 옴니시아의 노예들이 병기 등급에 속하는 악성 코드를 자신들의 멸종을 유예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풀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 외의 모든 방법을 다 시도했으니까. 저들이 시도한 것은 고기와 금속을 동원한 방법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잘못된 가정이다. 전장에 펼쳐진 누스피어 통합에는 어떤 침략적인 악성 코드도 없다. 게다가, 거짓 옴니시아의 노예들은 그녀의 데이터 요새에 펼쳐진 암호화 장벽을 뚫을 어떤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저들의 기술은 그녀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전투 장비에 비하면 형편없거나 부적절한 수준이다. 심지어, 모라벡의 연쇄를 거부하고 테라의 황제 편에 선 배신자 능인들이 화성에서 훔쳐 온 기술조차도 말이다.


그녀의 장비 모두, 0의 다섯째 사도가 직접 인증하고 설치한 것들이다. 왜 모두가 무효화된 상태란 말인가?


<의문>


통합군은 응답하지 않는다.


데이터의 수수께끼는 설명을 거부한다.


왜 그녀의 얼굴은 젖어 있는가?


아옛-원-태그가 데이터 기록을 센서 고장 이전으로 되감는다. 그녀의 통합군은 아스타르테스 제16군단의 베타 트라이스 전진을 지원하기 위해 하스가르드 관문 방면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확인> 베타 트라이스 전진을 감행하던 아스타르테스 제16군단은 형편없는 상태에 있는 쉬운 상대를 맞이했다. <확인> 아스타르테스 제9군단, 아스타르테스 제5군단, 아스타르테스 제7군단의 구성원이 확인되었다. <확인> 스키타리 Tr4.ki 대분기군이 아스타르테스 제16군단의 베타 트라이스 전진을 지원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확인> 예정 순응 시간 361초. <확인>


그리고 361초는 이미 도과했다.


베타 트라이스 전진 중이던 아스타르테스 제16군단은 아스타르테스 제9군단 산하 부대가 갑자기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인다고 보고했다. 보고문 중에는 ‘미쳐버렸다. 어떤 형태의 분노 속에서 이성을 잃었다’고 끝나는 내용이 있다. 또한, ‘아무런 기술 없이 짐승처럼 싸우고 있다’는 내용도 있다. 또한, ‘죽은 자의 피를 마시고 있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보충 데이터는 없다. 베타 트라이스 전진 중이던 아스타르테스 제16군단 전체가 응답이 없다. 센서 고장과 연관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동시적인 현상일 뿐인가?


<의문>


통합군은 응답하지 않는다.


왜 그녀의 얼굴은 젖어 있는가?


그녀는 더 심층적인 진단 검토를 시작한다. 더 이상 데이터의 수수께끼가 아니다. 데이터의 손실이다. 데이터 흐름의 상당 부분이 제거된 채다. 그녀가 생성한 데이터 그림자의 상당 부분이 사라진 채다.


통합군이 없기 때문에, 통합군이 응답하지 않는다.


그녀는 홀로, 눈과 입이 막힌 채다.


지금 사라진 것은, 엡타 전장 통합군이 데이터 흐름의 전도체로 활용하던 비물질계의 매질이다. 지금 그녀에게서 사라진 것은, 그녀에게 목적과 기능을 부여한 비물질적인 요소들이다.


워프를 사용할 수 없다. 워프가 중단되었다.


지원이 없다.


아옛-원-태그는 다른 기능을 통해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해 누스피어 연결을 해제한다. 다시는 사용할 일이 없으리라 여겼던 오래된 촉각과 물리적 매개체들을 초기화한다.


진부한 육체적 어플리케이션이 활성화되며 마치 얼굴을 걷어차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제 그녀는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육체적 고통이다. 이제 체열의 손실에 따른 곤란을 겪을 수 있다. 이제 신체적 평형에서 정렬되지 못한 상태가 된다. 그녀는 쓰러져 있다.


가마로부터 떨어진 채다. 가마가 뒤집혔기 때문이다. 가마가 뒤집힌 이유는 가마를 나르던 분기군의 기계노들이 도망쳤기 때문이다. 얼굴이 젖어 있는 것은, 그녀가 수렁에 쓰러져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얼굴을 만진다. 만지는 행위도, 얼굴도, 모두 낯설다. 두개골의 입부터 위로 올라가는 증강 센서 덩어리는 죽었거나 저전력 상태로 작동하는 것 같다. 일부는 금이 갔고, 플라스텍 파편이 떨어져 나가면서 인공 활액이 누출되는 중이다. 시각이 반쯤 멀고 청각에 장애를 일으킨 이유가 설명된다. 해상도가 낮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저해상도 열추적뿐이다. 이런 응급 상황을 대비해서, 선택적 기계 전환을 받는 동안 고기 눈과 고기 귀를 보존했어야 하는 것인데.


또 다른 낯선 감각 속에서 그녀가 전율한다. 진창의 한기, 그리고 씁쓸한 바람과 비가 느껴진다. 그 또한 부끄러움이다. 그녀는 너무도 아름답지 않았던가. 그녀의 우아한 비대칭적 증강과 삽입체 낭포의 미학을 수많은 이들이 흠모했다. 그녀는 이 증강물과 삽입체들이 훼손된 꼴을 다른 이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자신의 아름다움에 상처가 새겨지는 것이 끔찍하다.


고기 육신을 두른 이들의 또 다른 낯선 특징, 증오.


그리고, 또 다른 특성, 두려움.


무언가 다가온다. 그녀는 몸을 움츠린다. 희미한 저해상도에 익숙해진 그녀의 삽입체 낭포는 그것이 스키타리임을 알아본다. 스키타리에게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지만, 도움이 필요하다. 그녀는 통합군의 대변인 역할 속에서 변형된 바 없는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 보관하고 있던 고기 입으로 그것을 부른다. 그것은 이해하지 못한다. 고기 입으로는 어려운 암호나 약호를 만들 수 없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은 스키타리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그대로 스키타리는 차가운 진창에서 아옛-원-태그를 건져낸다. 긴 시간 작동하지 않았던 쇠약한 다리가 체중을 지탱하지 못하기에, 그녀는 스키타리에게 매달린다. 그녀의 두 팔은 근육이 불거진 널찍한 스키타리의 상체를 부드러이 감싸 안는다. 오른손의 가운뎃손가락에서 수상 돌기가 빠져나와 스키타리의 척추 아래에 꽂힌다. 스키타리는 요추 천공의 충격에 전율한다.


그녀는 지금 센서가 필요하다. 눈 또한 필요하다.


이 스키타리의 이름은 Ultr-5V다. Tr4.ki 대분기군 소속이다. 제작 기반은 남성이다. 그것이 아닌 그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그녀가 그랬듯, 그 또한 손상된 상태다. 그녀가 그랬듯, 역시 데이터를 탐색하고 있다. 그는 그녀의 끔찍하고 흉측한 몰골에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다. 마치 빗속에서 춤을 추는 연인들처럼 서로 팔짱을 낀 채 매달린 형상이다. 꿰뚫은 연결을 통해, 그는 이진법 질문의 격류를 쏟아낸다. 모두 그녀가 답할 수 없는 것들이다.


아옛-원-태그는 그의 시각계와 음향계에 접속한다. 모두 기능적이다. 불완전하지만, 망가진 그녀의 시스템보다는 훨씬 낫다. 다시 시각과 청각이 회복된다. 그의 두개골을 통해, 그녀는 보고 듣는다.


그녀 주위의 세상이 밝혀진다. 누스피어로 변형되지 않은 진짜 세상이다. 망가진 센서가 만들어내는 유령 같은 열화상보다 훨씬 나은 해상도다. 스키타리에게 설치된 광학 시스템은 전투를 위해 견고하고, 목표 포착을 위해 뛰어난 성능을 가진 존재니까.


그녀를 운반하던 위풍당당한 가마는 말 그대로 뒤집힌 채다. 진흙은 두껍고, 비는 너무 많이 내린다. 그 덕분에 마치 일그러진 잡음이 수직으로 그려지는 것 같다. 일대에 버려진 엡타 전장 통합군에 속한 전투 기계가 어렴풋이 보인다. 불의 열기가, 그리고 온도에 따라 다른 색채로 표시된 연기의 소용돌이가 보인다. 멀지 않은 곳, 약 52.6미터 정도 거리에 0의 다섯째 사도 클라인 펠트가 타고 있던 거대한 탑승 장비가 옆으로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역시 불타고 있다. 저 오래되고 우아한 창조물이 절뚝이다 쓰러져 있다니, 실로 큰 손실이다. 클라인 펠트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Ultr-5V가 그녀를 중심에 두고 천천히 선회하듯 움직이게 한다. 그녀의 얼굴은 그의 가슴에, 그녀의 팔은 그의 등에 밀착한다. 360도 시야가 필요하다. 대체 전장 통합군은 어디로 간 것인가? 기계노들은? Ultr-5V 말고 다른 스키타리들은?


그녀 주변의 모든 기계가 썩어가고 있다. 심지어 그녀의 가마조차도. 차체에 벗겨진 녹이 부풀어 오르며 비를 붉게 물들인다. 기계들에게 부어져 활력과 생기를 빚어내던 비물질계의 에너지가 사라진 것이다. 그 에너지가 사라진 순간, 수년의 사용과 마모가 한 번에 찾아와 차체를 구성하던 금속과 플라스텍들이 고작 몇분만에, 그녀의 눈앞에서 시들어가는 것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다.


워프가 그들을 떠났다. 워프가 그들을 제 운명에 맡겼다. 진흙과 한기, 액체와 더러움으로 빚어진 황량한 물질의 세계 위로 그들을 버린 채 떠났다. 그들을 지원하는 것도, 연결하는 것도 없다. 이제 그들은 부패와 부식 앞에 그대로 노출된다.


스키타리의 눈을 통해, 그녀는 다가오는 형상들을 본다. 빗속을 뚫고, 불타는 야영지의 폐허를 해치며 다가오고 있다. 마치 지금 내리는 비처럼, 혹은 슬어버린 녹처럼, 붉은 갑주 차림이다. 그리고, 역시 붉은 유기 잔여물로 얼룩져 있다. 아스타르테스 제9군단이다.


천천히, 침착하게 접근해 온다. 그녀의 기준으로, 합리적인 접근이다. 베타 트라이스 전진에 나선 제16군단의 보고에 기록된, 그들을 괴롭히던 야수적인 광기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아옛-원-태그는 비물질 매체의 갑작스러운 휴지가 그들에게 충격을 주어 안정을 되찾은 것으로 추론한다. 그녀는 무엇이 저들의 분노를 야기했는지 의문을 품는다. 상실감, 혹은 상처였을지도. 무엇이건, 그녀가 겪은 상실에 비할 바는 못 되리라.


아스타르테스 제9군단을 감싼 광기는 더 이상 없다. 하지만 저들은 여전히 아스타르테스 제9군단이다. 육체와 금속을 다루는 데 있어, 고도로 숙련된 전사들이다.


접근해 온다. 그녀는 Ultr-5V에게 교전을 통해 그녀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그 역시, 그녀만큼이나 두려움에 떨고 있기에.


둘은 서로를 꽉 붙잡는다. 그녀가 그의 눈을 감긴다.






이것은 종말과 죽음이다.


여기 어떤 승리도 없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온 이들에게도, 그들을 막기 위해 싸운 이들에게도. 상처 속의 테라가 고통에 몸부림친다. 상처의 고통을 달래려 전율하다 다른 상처가 찢겨 터진다. 움찔할 때마다 대륙이 갈라지고 지각이 경련한다. 수축할 때마다 지각의 척추가 찢기고, 골격이 갈리는 지각의 변동이 치민다. 그 입에 지각이 흘리는 피, 마그마의 불길이 가득하다.


몇몇은 앞으로 몇 년간은 옥좌성을 죽도록 내버려 둬야 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할 것이다. 너무도 부서졌고, 너무도 오염되었다. 전쟁과 워프의 독이 너무도 깊이 스몄으니까. 비물질계와 카오스의 역병에 이런 식으로 그 근간까지 노출된 다른 곳이라면, 순식간에 처분되었을 것이다. 영원한 기피 대상으로 지정되거나, 혹은 엑스테르미나투스를 통해 정화되었으리라.


그러나 이곳은 테라다. 종족이 태어난 요람이다. 인류의 씨앗이 자란 대지다. 그것을 버린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전쟁 속에서 멸망하는 것, 그리고 전쟁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생존은 그 자체로 전쟁보다 더 큰 부담을, 그리고 더 큰 의무를 수반한다. 생존자가 얼마나 다쳤건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전쟁이 인간의 영혼과 이 행성을 얼마나 훼손하고 죽음에 가깝게 몰아넣었느냐도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결국 견뎌냈고, 그에 따라서, 전쟁에 따른 정산 역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이다. 대의 없이 전쟁은 공허한 공포일 뿐이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죽어간 전쟁의 대의를 보존하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엄숙한 의무이다. 호루스와의 전쟁이 끝난 순간 자신이 살아남았음을 깨달은 이들은 감각을 잃다시피 한 상태고, 망각을 통해 벗어날 수 있기를 갈망할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남아야만 한다. 살아남지 못한 자들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살아남아야만 한다. 더 이상 기억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해, 기억을 이어가야 한다.


대의를 위해 싸운 전쟁 속에서, 그 대의는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죽은 자들이 산 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를 이해하라.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라. 우리는 떠났지만, 너희는 살아남았다.


우리가 쓰러진 방식과 쓰러진 방법을 기억하지 말라. 우리가 왜 쓰러졌는지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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